출판 번역, 영상 번역, 기술 번역 세 영역을 모두 섭렵해 보지 않고 이런 글을 싸지르기(?)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사실 세 번역 모두 발을 담가 보기는 했습니다만 깊이 있게 들어가 본 것은 영상번역 하나 뿐이라 선무당의 사람 잡기가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번역을 시작하려는 분께 무엇을 시작하면 좋을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짧은 제 소견을 조심히 밝혀 봅니다. 현역 번역가분들이 댓글을 통해 조언, 의견을 많이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제 글에 이견이 있다면 그것도 넘나 환영합니다. 이 기회에 세 영역이 활발히 교류하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좋겠습니다.
다루는 분야
출판 번역: 소설, 경제경영서, 자기계발서, 인문, 사회, 역사, 문화, 예술, 과학, 취미, 여행 등
영상 번역: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예능 등
기술 번역: IT(웹사이트, 게임), 기술(기계, 전기, 공학, 건축), 법률, 의학, 비즈니스(금융, 회계, 경제경영, 마케팅) 등
매체에 따른 분류로 크게 세 영역 즉 출판 번역, 영상 번역, 기술 번역으로 나누지만 이 안에서도 자기만의 전문 분야를 다져 놓는 것이 좋습니다. 책을 번역한다고 해서 세상 모든 책을 전부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흔히 처음 번역을 시작하려는 분들은 열정과 의욕이 앞서서 또는 일을 받으려는 절박함이 앞서서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다 번역할 거야!’, ‘내가 못하는 번역이란 없어, 없어야 해!’라는 자기 최면에 시달리곤 합니다. (저도 당연히… 하하하…) 경력 쌓기가 절실한 초창기에는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없겠지만 전문 분야를 만들어 놓아야 장기적으로 유리한 게임이 됩니다. 강력한 자기만의 전문 영역이 있어서 세 영역을 모두 넘나들어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이 전공이라면 과학 잡지, 과학 다큐멘터리, 과학 기술 문서를 모두 번역할 수 있겠군요. 물론 책 번역을 전문 분야로, 영상 번역을 전문 분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세 영역에는 또 고유의 번역 특성이 있어서 그 자체로 전문성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죠.
번역 특징
출판 번역
책을 읽고 이해하고 글을 써야 하므로 글쓰기와 관련된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번역도 역시 글쓰기이기는 하지만 책 번역은 더더욱 글쓰기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독해력, 문해력이 훌륭하고 논리정연한 글쓰기에 능해야 합니다. 다른 번역보다 바로 책 번역에서 어릴 적 다독량이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면에서 독서량이 부족한 사람은 어휘력, 표현력에서 그 민낯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다른 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소설, 에세이, 시 같은 경우 단순히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뉘앙스, 분위기, 문체까지 재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어를 이런 수준까지 습득하기란 보통 노력이 아닐 것 같군요. 어쨌든 영어든 국어든 주로 문어 텍스트를 다루므로 이에 대비하는 것이 좋고, 전문화하고 싶은 분야의 글쓰기가 어떠한지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기술 문서와 달리 책은 맥락이 매우 중요해서 번역 메모리나 캣툴이 사실상 효용이 없습니다. 하나의 문장도 맥락마다 얼마든지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고, 문장 1 대 1 번역보다 전체 맥락과 논리를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루당 처리하는 단어 수도 기술 문서보다 적은 편이라 번역 속도가 더딥니다.
영상 번역
영상 번역은 상대적으로 전문 지식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출판 번역만큼 유려한 문장력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러운 표현을 중요시합니다. 주로 영화, 드라마를 다루므로 구어 텍스트에 익숙해야 하고 상황에 어울리는 표현, 어색하고 딱딱하지 않은 구어체 구사가 중요합니다. 외국어든 한국어든 최신 유행어, 신조어, (특히 외국어의) 지방 특색어, 슬랭어와 씨름해야 하는 애로 사항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영상 번역 글쓰기의 가장 큰 특징은 글자 수 제한입니다. 화면에 2~3초 짧게 뜨는 문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내용을 압축, 생략, 변형해야 하고, 간결하고 짧은 표현을 연습해야 합니다. 또 하나 영상 번역만의 특이점은 싱크 맞추기, 영상 다루기 등 번역 외 부가 작업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상 번역 역시 번역 메모리는 큰 도움이 못 되지만 영상 재생과 자막에 특화된 자체 캣툴이 있고 이를 필수로 사용해야 합니다.
기술 번역
기술 문서 번역 역시 유려한 문장력보다는 정확한 정보 전달, 원문의 충실성이 훨씬 강조되는 영역입니다. 또한 전문 분야, 전문 지식이 빛을 발휘하는 영역이고요. 특히 법률, 의학 같은 고도의 전문 분야는 전문 지식의 유무가 오역을 가르는 열쇠, 품질을 결정하는 핵심이 됩니다. 전문 지식과 더불어 해당 분야의 어휘, 고유한 표현법에 익숙해야겠죠. 기술 번역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번역 메모리, 캣툴 사용이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정형화된 문장이 많아 문장 단위로 번역하고 또 이를 재사용하는 것이 가능해 번역 메모리가 쌓이면 번역 속도와 생산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다른 번역과 비교하면 비교적 덜 맥락 의존적이라 문장을 만들어 내는 일도 수월하리라 예상합니다. 기술 번역에도 다양한 포맷의 텍스트 처리, 파일 처리, 편집 등 번역 외 부가 작업이 많아서 각종 프로그램 사용에 능숙해야 합니다.
시장 전망
출판 번역
국내 출판 시장은 불황이라고들 합니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10년 이상 경력가도 점점 일감이 줄어드는 추세 같습니다. 제가 볼 때 국내 출판 시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레드 오션입니다. 영화와 드라마, 웹툰, 유튜브 등 책 이외에 즐길 거리가 넘쳐 납니다. 매체도 점점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책 대여 서비스, 전자책 무제한 서비스를 이용하다 보면 무거운 종이책은 소장 가치가 있는 것만 사게 됩니다. 국민의 책 이용률을 생각해 보면 출판 번역 시장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꾸준히 불황일 것입니다. 해외 시장은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해외에 소개되지 않은 우리나라 콘텐츠가 무궁무진합니다.
다시 국내 시장 이야기로 돌아가면, 출판사는 각자 알음알음으로 번역가를 구하고 주로 우리말이 유려하고 세련된 번역가를 선호합니다. 번역 에이전시와 계약하는 곳도 있지만 번역가와 직거래를 선호하는 곳도 많습니다. 하지만 번역료는 평균화되어 있어 어디든 비슷한 보수를 지불하고 경력이 오래되어도 번역료가 크게 오르지는 않습니다.
영상 번역
전에도 한 번 언급했지만 영상 번역은 영화나 드라마 제작 특성상 거대 공룡 기업이 주도하므로 공급 독점화가 되어 있습니다. 독점화의 의미는 번역 단가 후려치기죠. 하지만 물량은 어마어마하게 많고 앞으로도 시장이 죽을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죠. 물량이 많은 것은 번역가에게 희소식이지만 품질이 소비에 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악랄한 편집 수준이 아니고서야 번역이 나쁘다고 영화 안 보는 일은 없잖아요!) 실력이 좋다고 고수익을 버는 일이란 없습니다! (다시 번역 단가가 후려쳐집니다. 너무 우울한 말만 되풀이했는데 여기도 잘 찾아보면 단가가 좋은 일감이 있습니다.) 넷플릭스나 영화사 같은 원청에서 직접 번역가를 고용하는 일은 드물고 대부분 번역 에이전시에 일을 맡기니까 번역하려면 번역 에이전시를 찾아가야 합니다. 국내 시장 및 해외 시장이 모두 활성화되어 있고, 공동 작업 및 협업이 활발합니다.
기술 번역
여러 기업체, 관공서, 단체 등에서 문서 번역을 의뢰하니 이곳은 독점이 없습니다만 이 역시 기업이 직접 번역가와 계약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번역 에이전시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 세계는 공급과 수요 채널이 아주 다양하고 원하는 품질 수준과 보수도 다양하고, 전문 분야도 그 범위가 넓어서 틈새를 활용하기가 참 좋습니다. 일례로 저렴한 단가를 원하는 곳은 품질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고 적당함에 만족하죠. 번역료를 낮추면 일감을 많이 받을 수 있고, 경력을 쌓고 품질을 높이면 번역료를 높여 갈 수 있습니다. 번역가가 귀한 분야에 도전하면 이 역시 몸값을 높이는 방법이 되겠죠. 영상, 출판처럼 콘텐츠 소비가 아닌 생산, 판매의 기업 활동과 연결된 번역이라 시장이 안정적이고 높은 보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국내 시장은 번역 에이전시가 똘똘 뭉쳐서 낮은 단가를 고수하니까 ‘다양성의 세계’ 해외 시장을 노려볼 만합니다.
고려해야 할 번역가 실력
영상 번역 입문자를 관리하던 시절, 능력이 뛰어나지만 안타깝게도 감수팀의 평가를 이겨 내지 못하고 저희와 결별한 한 번역가를 보았습니다. 유려한 글솜씨가 실력의 핵심이라고 믿었던 감수팀이 표현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던 덕분이죠. 그 번역가가 표현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원문 텍스트 이해도가 높고 철저한 정보 검색과 배경지식 습득으로 전문 지식을 잘 처리했습니다. 기술 번역을 했더라면 실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했을지 모릅니다. 내게 맞는 번역 분야 찾기가 너무나 중요한 이유입니다.
번역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소는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 외국어(또는 출발어)가 얼마나 유창한가, 어휘와 문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사용하는가?
- 우리말 (또는 도착어) 표현력이 좋은가? 뜻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쉽고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의도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나타내는가?
-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또는 기술 번역의 경우 전문 지식이 충분한가?
번역 품질을 높이는 데 세 요소는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귀중하지만 현실적으로 세 가지를 모두 잘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이죠. 누군가는 글을 귀신같이 잘 쓰겠지만 외국어 실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할 테고 누군가는 외국어 실력이 뛰어난 반면 우리말 표현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국어 실력도 고만고만, 외국어 실력도 고만고만하지만 오랜 해외 경험으로 배경지식이 풍부해 무지에서 비롯한 오역을 콕콕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취약점과 강점을 분석해서 강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분야에 도전하세요.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출판 번역은 번역 우월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력을 번역 품질의 핵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문장력 하면 출판 번역가들 실력이 혀를 내두를 정도죠. 하지만 뛰어난 문장력이 자만의 근거가 될지는 몰라도 다른 번역가를 얕볼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도 사실 출판 번역업계의 영향을 받아 그런 문장력 우월주의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다양한 배경의 번역가들을 만나면서 번역이라는 작업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 있습니다. (또 예전의 행태를 반성하고 있습니다.) 번역가란 서로 물고 헐뜯을 적이 아니라 힘을 뭉쳐 함께 살아 나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우리말 실력이 좋은 사람과 외국어 실력이 출중한 사람, 사회 문화적 배경을 잘 아는 사람 셋이 모이면 완벽한 번역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요? 힘을 합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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