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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세계 고찰

정말 특이한 이력의 번역가

by 이미향 2022. 8. 11.

흔히 번역가 인터뷰를 보면 화려한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등부터 외국어 몰입 교육, 해당 언어 전공 출신, 통번역 대학원 출신, 어학 연수, 높은 자격증 점수, 해외 거주 경험이나 해외 근무 등등. 그런 이력 없는 번역가를 찾기가 힘든데 아마 진짜 없어서가 아니라 나서지 않아서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입문자들은 ‘아! 번역가가 되려면 저 정도 스펙은 쌓아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요.

블로그를 쓰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싶은데 굳이 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또 있습니다.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이, 내가 나를 보는 시선과 사뭇 다르더라고요.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다른 사람은 나를 이렇게 생각하겠지?’ 하는 추측조차 빗나가더이다. (헐…) 한번은 친한 번역가가 그랬어요. 매우 존경받고 실력 좋은 번역가였죠. 나더러 자신감이 너무 강하다고, 심하게 콧대 높으니까 좀 꺽어야 하지 않나 고민했더랍니다. (헐!!) 그런데 요즘 또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근심 고민, 걱정 불안 하나도 없는 번역가, 에이전시가 매우 신뢰하고 일감을 몰아 받고 타인을 리뷰하는, 감히 근접할 수도 없는 위치의 번역가로 여기는 분위기. (허얼!!) 아뇨, 아뇨! 절대 아니에요.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쓰는 스타일이 그랬을까요? 가끔 위대한 정신 승리를 시전하기도 하지만 그건 그저 정신에서 나온 거지, 내 환경에서 제공한 자신감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마음의 문제 같아요. 그래서 정말 특이한 이력의 번역가를 소개해 보려 합니다. 아, 물론 저입니다. 제 글이 왜곡된 제 모습을 바로잡고 화려한 이력 없는 입문자에게 힘을 주면 좋겠습니다. 또한 번역가에게 진짜 필요한 실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나를 노출하는 행위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부담스럽습니다. 수위 조절 안 되면 어떡하나, 공격의 빌미가 되면 어떡하나, 고민입니다. 특히 저처럼 우여곡절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죠. 음… 그래도 실보다 득이 더 많으리라 마음을 다독여 봅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력 - 외국어 몰입 교육, 해당 언어 전공 출신, 통번역 대학원 출신, 어학 연수, 높은 자격증 점수, 해외 거주 경험이나 해외 근무, 이런 거 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흔한 토익 시험 한번 치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은 수능도 안 봤어요.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죠. 딱히 대학 진학에 대한 희망이 없었고, 집에서도 돈 없다 분위기여서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특별한 기술 없이 고졸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시작했고 가족의 생계와 가족 돌봄까지 책임져야 해서 별도로 공부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제 마음 한편에는 학업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학력 콤플렉스가 자리 잡았습니다. 그렇지만 서서히 아주 조금씩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갔고, 한 10년이 지나서였나? 비로소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본격적으로 번역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영한 번역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 제 영어 실력이란 초딩과 다름없었고 (아, 요즘 초딩 대박 잘하던데… 초딩보다 못한 수준?) 그 실력으로 덜컥 아카데미부터 덤볐으니 얼마나 고생 고생 개고생했는지 말도 못해요. 그래도 제 나름, 한 1~2년 영어 공부 하고 들어갔는데 그래봤자 중1이 성인 대상 아카데미 수업을 듣는 느낌? 기초는 한없이 모자라고 과제 분량 많아서 허덕대고, 남들 한두 시간이면 끝날 분량을 저는 하루 종일 붙잡고 있고… 정말 무모하게 ‘맨땅에 헤딩’을 시작했죠.

하고 많은 경로 중에 저는 왜 하필 그 고생길을 택했을까요? 세월이 흘러 학업에 대한 제 생각은 조금 바뀌었어요. 제가 진짜 바라는 건 좋은 학력이 아니라 그저 앎의 기쁨을 얻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제게 즐거움이었죠. 학력 쌓느라 불필요하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바로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했던 겁니다. 물론 고생길이었죠. 수없는 불면의 나날과 스트레스와 압박을 받아도 ‘제가 공부를 할 수 있는 현실, 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니 버티었겠죠. 사실 잠 못 자고 과제 하는 건 몸이 고생이지, 마음이 힘들 게 없었습니다. (잠 못 자는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요. 일하느라… 흑흑…) 뭐, 사실 불면의 밤과 마감 압박을 버티고 일을 완수해 내는 것도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긴 합니다. 잡초처럼 살다 보니 그건 덤으로 얻은 제 장점 아닌가 싶습니다. 음… 이게 생각보다 저는 꽤 심각해요. 전공 1년치 수업을 일주일 만에 파악하고 시험 문제를 풀어야 하는 그런 느낌이죠. 그러면 72시간 내 수면 시간 총 4시간입니다. 나중에 러너스 하이 옵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에게 이 방식을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좀 더 여유를 갖고 공부하세요.

여하튼 그리하여 아카데미를 졸업한 저는 어찌저찌하다가 번역 품질 관리 팀의 팀장을 맡게 됩니다. 번역 공부 기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번역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기회와 운이 닿았던 것 같습니다. 기회가 오자마자 제가 꽉 낚아챘죠. 사실은 실력도 뒷받침되어야 가능합니다. 그 실력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려 합니다. 이 팀장 일은 사실 다 기피했어요. 단순히 번역만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팀을 관리하고, 사람을 관리해야 하고, 윗선과 번역가를 중재해야 하고, 또 번역가들 사이를 중재해야 하고, 업무 플로우를 만들어야 하고…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 경력이 제가 해외 시장에 진출하게 어마어마하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두 번째 도전은 이제 해외 시장입니다.

자, 볼까요? 제가 자격증이라 부르는 ‘대학 졸업장’이 혹시 필요할까 싶어서 따 놓았습니다. 가장 빠르고 저렴하고 쉬운 방법으로요. 전 그냥 단지 졸업장만 있으면 됐거든요. (그런데 실무에서는 졸업장이 전혀 필요 없었다는 것.) 또 국내에서 경력도 쌓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국내에서 날고 긴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스피킹 공포! 롸이팅 공포! 여전히 저는 사회 초년생 시절처럼 작고 움츠러들었습니다. ‘그러면 스피킹 실력과 라이팅 실력을 쌓고 도전하면 되지!’ 맞습니다. 그런데 또 그 맨땅에 헤딩하기를 시전했어요. 스피킹과 라이팅 실력을 쌓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업에서 뒹구는 것이라고 믿으면서요. 아,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무모하게 ‘맨땅에 헤딩하기’가 특기인가 봅니다. 그것도 참 성격이 희안하네요. 원래는 최대한 느긋하게 천천히 해외 시장 탐색해 가면서, 필요한 게 뭔지 파악하면서, 거기 맞추어 공부해 가면서 시작하려 했어요. 그런데 해외 에이전시와 엮이다 보니 또 준비 안 된 제게 (제 스스로 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끼는 제게) 일이 몰려옵니다. 사양도 많이 했는데 오퍼가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요. 실수하면 어떡하지? 인터뷰 대박 망치면 어떡하지? 뭐?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라고? 끄아아아악!!

저의 해외 시장 도전기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샘플 테스트 도전도 많이 하고 낙방도 많이 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유수의 해외 에이전시에서 품질 관리 팀장을 맡아 보는 게 목표입니다. 이대로 죽 달려가면서 그 목표를 이루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룬 성과를 그저 ‘운이 좋았어요. 기회를 잘 잡았어요.’라는 평범한 말로 대체하는 것 말고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려 합니다. 아무 배경 없는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요? 대부분 사람들은 번역하려면 외국어 실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 전공 학력, 해외 경험을 내세웁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잠깐 곁길로 빠져보면 특히 그 나라 문화와 트렌드를 잘 안다는 점이 번역에서 매우 강력한 이점이자 필수 사항입니다. 문화 배경 잘 아는 게 외국어 독해 잘하는 것보다 백배 천배 더 중요해요.) 그런데 번역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좋은 입지를 얻으려면 언어 사고력, 비즈니스 전략, 외로워도 슬퍼도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강한 정신(맨땅에 헤딩하기를 즐기는 제 스타일?)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나 실력이란 면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외국어 실력보다 더 중요한 건 언어 사고력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건 한번 포스팅한 적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논술 잘하는 능력, 명탐정의 날카로운 추리력과 논리력, 문해력이라 볼 수 있습니다. 외국어 실력은 저처럼 부족하게 시작해도 일하면서 늡니다. 늘 수밖에 없죠. 그런데 다들 이 언어 사고력을 간과해서 실패합니다. 이 능력은 어린 시절부터 다독, 논술, 토론, 글쓰기 등을 통해 키워야 합니다. 외국어 실력을 키우는 데 최소 10년 이상이 걸리는 것처럼 이 언어 사고력 역시 10년 이상 훈련해야 합니다. 저는 이 뛰어난 언어 감각 덕분에 그 초보 같은 외국어 실력으로도 꾸역꾸역 살아남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 독해’가 아닙니다. 번역은 이해이고 해석이고 통찰이고 설득입니다.

그러면 내 언어 사고력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판단할까요? 그게 제일 문제입니다. 이걸 입증할 객관적 자료나 시험이 없어요. 북미나 유럽에서는 토론 문화가 있어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사고력 훈련을 받지만 우리나라 교육에서는 이 방면이 가장 취약하다고 평가되죠. 요즘 사교육에서는 논술과 토론이 중요시되는 추세 같은데 공교육 현장은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라떼 시절보다는 좀 달라졌겠죠. 여하튼 자신의 언어 사고력 능력을 점검해야 하고 이 실력을 키워야 장기적으로 번역 세계에서 살아남습니다. 그러니 번역가 지망생은 외국어뿐 아니라 사고력 실력을 늘리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시간과 힘을 쏟아야 합니다. 사실 번역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분들은 – 어학 연수를 다녀와서가 아니라 - 이 능력이 뛰어나서 성공한 것입니다. 또한 포기하는 모든 분들은 이 능력이 부족해서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럼 언어 사고력을 어떻게 훈련하지?’ 궁금하실 겁니다. 물론 번역가로 활동하는 분들은 따로 언어 사고력을 공부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이미 훈련되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번역가로 잘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거의 깨닫지 못할 거예요. 제 경우는 좀… 사실 타고난 것 같습니다. 입문자에게 희망적인 말은 아니지만 여하튼 타고난 것 같네요. 저의 부모님은 전쟁 시절 태어나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분들이고 자식들 교육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아무리 타고난들 훈련 경험이 꼭 필요한데 제 경우는 돌이켜보면, 공공 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어마어마하게 읽었던 경험, 교회에서 받았던 교육 – 글을 읽고 요약 정리하고 문제의 답을 찾고 토론했던 경험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정도로 사고력 훈련이 잘되면 우리나라 아이들 다 잘하겠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도서관을 제집 드나들 듯 하며 책을 알아서 찾아 읽고, 아무도 강제하지 않았는데 꼭 교회 수업에 참가해 열심히 공부하고,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동생과 열띤 토론을 했던 제 성격을 보니 타고난 점 역시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공교육 인프라는 열악한 환경 속 아이들에게 진짜 희망이에요!)

지금 고민해 보니 성인 상대로 논술이나 사고력 훈련을 해 주는 과정이 없네요. 음… 작가 지망생 글쓰기 훈련을 시키는 학원 정도? 글이 용두사미가 되어 버렸네요. 좋은 결론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하튼 이 글을 읽고, 번역가 준비를 새로운 관점으로 정리하고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아보게 되었다면 제 글의 목적이 달성된 것 같습니다. 모두 즐번~ 하세요!

- 안 그래도 비수기인데 심각한 경제 침제 위기 속에 더욱 일이 없어 한가한 ... 이미향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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