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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세계 고찰

번역가란 직업으로 정말 먹고살 수 있을까? - 힘든 시기를 보내는 입문자들에게

by 이미향 2022. 4. 19.

질문

안녕하세요? H 번역가입니다. 저는 번역에 입문하고 지난 2년 동안 어렵사리 역서를 두 권 냈습니다. 하지만 일이 없는 요즘 더욱 불안이 짙어집니다. 번역가로서 수입이 너무 적고, 너무나 불안정합니다. 첫 3-4년은 이러리라 각오하고 시작했지만 그런 굳은 각오가 무색하게도 마음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들리는 말로는 10년 된 베테랑 출판 번역가도 번역만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넉넉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요? 다른 번역가들의 상황은 어떤가요? 번역을 정말 사랑하지만 번역은 부업으로만 삼아야 할까요?

 

답변

H 번역가님의 고민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하던 고민이고 수없이 많은 번역가가 지금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고민입니다. 저는 번역 아카데미 출신이라 함께 시작한 동기가 많은데 늘 서로 불안과 불확실성을 하소연하며 살았죠. 그리고 대부분 1-2년 안에 번역을 그만두었습니다. 끝까지 살아남는 인원은 매우 소수입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소수에 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텐데 사실 다른 번역가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더 중요할 겁니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 현재 번역 시장 현황을 분석하고, 거기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 동향을 예측해 보는 세 가지 프로세스를 제안합니다.

 

저는 출판번역가가 아니지만 제가 알고 지내던 출판번역가들의 이야기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로 대략 출판번역가들의 사정을 말해 보면… H 번역가님처럼 이제 막 시작하는 출판번역가들은 보통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한다고 합니다. 대부분 본업이 따로 있고요. 자리 잡고 꾸준히 일이 들어오는 번역가의 경우 일 자체가 끊길 걱정은 덜 하다 해도 수입 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합니다. 대략 유추해 보면 현재 한국 최저 임금 수준이거나 잘되면 최저 임금의 1.5배 수준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적당할 수도 있지만 10, 20년이 되어도 그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또 번역가가 되기 위해 쏟았던 열정과 시간과 노동력을 생각하면 정당한 임금이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거기 한몫 더해 출판 자체가 불황이라 10, 20년 된 일부 번역가도 적극적으로 새 거래처를 발굴하지 않으면 점차 일감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실력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거죠.

 

좋은 이야기를 못 전해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주간번역가에서 이런 글을 보았는데요, 출판이 불황인 이유는 출간하는 책 자체가 줄어서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점점 책을 읽지 않습니다. 요즘은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잖아요. 그런데 번역가는 평생 직업이고 신규 번역가가 1년에 수십 명씩 쏟아져 나옵니다. 수요는 줄어드는데 번역하겠다는 사람은 늘어나니 기회가 찾아오기 드물고 번역료가 오르기도 힘들 겁니다. 사실 모든 번역가들이 이 사실을 다 알고도 시작하셨고 번역을 너무너무 좋아해서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부 번역가들이 많습니다. 경제적으로 배우자에게 의지하고,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며 번역하고, 소소한 번역 수입에 만족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분들요. 그러니까 가정 경제를 지탱해야 하는 입장에선 출판번역 못 하죠.

 

H 번역가님께서 꾸준히 일감 받는 베테랑 번역가대열에 설 수 있을지, 그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시기가 언제일지 이런 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출판번역가들은 best of best, top of top이 되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출판업이다 보니 관계자들의 눈높이는 정말이지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습니다. 이에 맞춰 한국 최고 실력 번역가들은 다 출판번역에 모인 것 같습니다. 영상번역, 기술번역보다 출판번역의 벽이 훨씬 높죠. 거기서 이미 역서 두 권을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능성 엿보이는 고무적인 성과입니다. 그래도 본인 실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실력 향상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할 겁니다.

 

번역업계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거예요. 출판번역, 영상번역, 기술번역이라고들 하죠. 여기서 높은 요율을 받을 수 있는 곳은 기술번역밖에 없습니다. 번역의 신이 되어버린 출판번역 베테랑 수준이 아니어도 다른 이들보다 좋은 실력을 가졌다면 좋은 요율을 받을 수 있어요. 실제 그런 성공 사례도 많고요. 그러니 번역으로 돈을 잘 벌려면, 그러니까 4인 가족을 너끈히 혼자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입을 얻으려면 기술번역, 산업번역으로 가서 좋은 입지를 얻으면 됩니다. 여기서 또 돈을 추구하느냐, 내가 좋아하는 책 번역을 추구하느냐는 문제에 부딪치게 될 거예요. 기술번역이란 매뉴얼, 마케팅, IT, 의학, 법률 같은 문서들이니까요.

 

저는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요. 읽을거리, 볼거리가 넘쳐나요. 그러니 번역 역시 바뀔 수밖에 없다고 봐요. 사람들이 이제 인터넷 보고, 유튜브 보고, 웹툰 보고 영화 보고 드라마 보잖아요. 번역 역시 인터넷 기사, 뉴스, 유튜브, 웹툰, 영화로 옮겨가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겠죠. 출판번역은 희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출판이 불황일지언정 완전히 망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출판번역을 하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현실을 놓치지 말라고, 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타협점과 돌파구를 찾는 균형감을 찾으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AI 번역기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어요. 여기서 번역가들이 어떻게 살아남을지도 많은 번역가들의 과제예요. 아직 피부로 못 느끼는 분들도 많겠지만 기술번역 바로 이 분야부터 인간을 대체하는 AI 번역이 계속 늘어나는 추세예요. 유튜브도 자동 번역 쓰지 굳이 돈 주고 인간 번역가 안 쓰죠. 우울한 이야기만 늘어놓았지만 저는 여기서도 번역가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있다고 봐요. 그 방법은 모두 각자의 노하우가 되겠지요.

 

제 답변이 완전히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그 외 의문 사항은 모두 각자 풀어야 할 숙제일 것 같아요. 모두가 처한 상황과 열망이 다르니까요. 먼저 인터넷을 통해 구체적인 정보와 사례를 많이 찾아보라고 조언해 드리고 싶습니다. 번역 사회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로 방향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이메일로 오갔던 문의와 답변을 새로 엮어 올립니다. 많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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